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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조선을 담다 3강- 한양도성, 다시 서다

선조 25년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부산성, 충주가 무너졌다. 이후 임금이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선조가 떠나고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는 와중에 궁궐은 모두 불타버렸다. 선조 26년, 서울을 떠난지 1년 반 만에 선조와 조정 신료들이 서울로 돌아 왔다. 선조 37년, 더 구체적으로 도성재건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해 10월 경에는 공사가 한창 벌어졌고, 그 규모도 매우 컸다. 선조 38년 3월부터 선조 39년 11월 착공 단계에 이르기까지 경복궁은 중건의 대상으로 논의되었다. 인력과 물자의 투입이 과도하여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선조 39년, 전현령 이국필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영건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여 조정에서 그 주장을 따랐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하여 경복궁을 포기하고 대신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40년 이후 이미 준비하여 놓은 물력과 인력을 가지고 이미 시작한 공사를 진척시키는 정도여서 궁궐 중건 공사는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광해군은 선조가 승하한 다음 날 즉위하였다. 그 해 종묘가 완공되고 인정전을 비롯한 창덕궁의 큰 전각들이 거의 완성되었다. 광해군 3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시어소의 명칭을 경운궁으로 명명.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안치시킨 후 살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사사하였다. 광해군 7년,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선수청의 인원을 확대하고 창경궁 공사 확장 독려하였다. 광해군 8년, 봄부터 다시 새 궁궐 영건을 추진하였다. 광해군 9년 초, 인왕산 아래 사직단 뒤편에 이궁으로 새 궁궐을 짓겠다. 인경궁 공사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그 해 중순, 경덕궁을 영건하자는 제의가 술인 김일룡에게 들어왔다. 신료들은 반대 의견을 펼쳤다. 광해군은 공사를 독촉하였고, 새로 지은 궁궐로 이어할 준비를 하기 위해 공작청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15년, 인경궁과 경덕궁의 최종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인조반정을 맞고 말았다. 인조대 들어서 새 양궐체제가 정립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의해 성을 쌓는 것이 통제 되었다.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동성을 수축하고 도성 주위의 성들을 새로 쌓거나 고칠 수 있었다. 숙종 즉위 당시의 중국 정세. 청나라에 대해서 명의 잔존 세력이 반란을 꾀하였다. 대보단이 완공한 후, 정신적으로 청나라의 구속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강화, 남한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축성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도성부터 축성이 이루어진다. 서울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되는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의 도래를 알리는 현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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